
2023년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우리의 하루'는 감독의 예술적 여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응축된 형태의 미학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극도의 미니멀리즘적 형식과 일상의 대화라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과 예술가로서의 고독을 탐구합니다. 영화의 서사는 은퇴한 여배우(김민희 분)가 후배 배우와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과, 나이 든 시인(기주봉 분)이 젊은 방문객들과 문학 및 삶의 회한을 나누는 장면으로 단순하게 교차됩니다. 이러한 구조적 단순성은 영화를 전통적인 서사 문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관객이 극적 사건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현전'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는 이 집중을 최대화하기 위해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이는 홍상수 영화의 특징인 '단조로운 아름다움(Monotonous Beauty)'을 형성합니다. '우리의 하루'는 서사적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 없이, 오직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공간(좁은 실내, 식탁, 정원), 그리고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요리, 고양이 돌보기, 술 마시기)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예술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줌인/줌아웃, 롱테이크, 그리고 자연광만을 활용하는 소박한 촬영 기법을 고수하며, 이는 관객이 극적 환상에 빠지기보다 인물들의 대화 자체에 집중하고 그들의 심리적 미묘함을 포착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미니멀리즘적 형식은 영화를 인공적인 서사 구조로부터 해방시키고,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삶의 한 조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존재론적 리얼리즘'을 구현합니다. 특히 영화는 '죽음'과 '예술'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지극히 일상적이고 가벼운 어조로 다루면서, 삶의 부조리함과 아름다움이 결국 반복되는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통찰합니다. 이 글은 '우리의 하루'가 제시하는 독창적인 미학적 구조를 세 가지 핵심 관점을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첫째, 극도의 미니멀리즘 미학이 어떻게 대화라는 형식적 제약을 통해 존재의 철학적 질문을 심화시키는지 탐구합니다. 둘째,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공간적 패턴과 행위(식사, 음주, 이동)가 일상의 '의례화'를 통해 삶의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와 무의미함을 어떻게 상징하는지 분석합니다. 셋째, 여배우와 시인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죽음'과 '노년'이라는 주제가 예술가적 고독과 결합하여 어떻게 삶의 근원적인 비극성과 희극성을 동시에 드러내는지 논합니다. 이 모든 미학적 선택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하루'를 일상을 통한 존재론적 탐구로 만들며, 인위적인 허구의 장막을 걷어내고 관객에게 삶의 순수한 단면을 직시하도록 도전합니다. 이 영화의 미학은 절제와 소박함을 통해 오히려 가장 깊고 울림 있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설적인 힘을 지닙니다.
우리의 하루 미니멀리즘 미학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 감독이 수십 년간 다듬어온 미니멀리즘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 영화에서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제작 스타일을 넘어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의 진실을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기능합니다. 서사는 인물들이 하루 동안 겪는 단편적인 만남과 대화의 조각들로 환원되어, 극적인 사건이나 인과 관계의 사슬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이러한 서사적 미니멀리즘은 관객의 서사적 기대(Plot Expectation)를 의도적으로 좌절시키고, 대신 대화의 질감, 인물의 심리적 미동, 그리고 시간의 흐름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시선을 유도합니다.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는 이 집중을 최대화하기 위해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이는 홍상수 영화의 특징인 '단조로운 아름다움(Monotonous Beauty)'을 형성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미니멀리즘의 형식적 특징은 카메라의 운용입니다. 카메라는 대부분 삼각대에 고정되어 인물들을 응시하는 롱테이크로 진행되며, 이동이나 복잡한 앵글 변화를 최소화합니다. 이 고정된 시선은 관객에게 마치 연극 무대를 관찰하는 듯한 객관적 거리를 부여하며, 인물들의 행위를 판단하거나 감정적으로 과잉 몰입하는 것을 막습니다. 특히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인 갑작스러운 줌인(Sudden Zoom-in) 기법은 이 미니멀리즘적 정조 속에서 폭발적인 의미를 획득합니다. 이 줌인은 서사적 전환점이나 중요한 발화에 맞추어 사용되기보다는, 종종 지극히 사소하거나 어색한 순간, 혹은 인물의 얼굴에 떠오르는 찰나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는 마치 무의식의 영역을 갑작스럽게 해부하는 시각적 제스처로, 관객에게 인물들이 나누는 평범한 대화 밑에 숨겨진 존재의 불안정성과 진실의 순간을 강렬하게 주입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대화는 이 영화의 모든 것입니다. 대화는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인물들이 자신의 삶의 부조리함과 불안을 언어라는 소박한 그릇에 담아 소화하려는 의례적 행위입니다. 영화 속 대화는 일상적인 표피(고양이, 요리, 날씨)에서 시작해 갑자기 '죽음', '노년의 고통', '예술적 실패', '영원회귀'와 같은 거대한 철학적 주제로 비약합니다. 여배우가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언급할 때, 그 평온한 어조와 대비되는 주제의 무게는 삶의 비극성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러한 대화의 비약을 통해, 삶의 가장 심오한 진실이 특별하고 극적인 순간이 아닌, 가장 평범하고 맥락 없는 일상의 순간에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통찰합니다. 이 소박한 언어는 비극을 직면할 때 인간이 사용하는 가장 정직하고 무방비한 방어 기제이며, 복잡한 수사학 없이도 존재의 진실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미니멀리즘은 또한 시간의 재현 방식에서도 혁신적입니다. 영화는 '하루'라는 단순한 시간적 단위 내에서 두 개의 서사를 병치시키지만, 그 시간은 극적으로 압축되거나 생략되지 않고, 마치 관객이 인물들의 삶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시간의 연장(Duration)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한, 시계의 객관적인 시간이 아닌 주체가 경험하는 지속되는 시간(Durée)의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롱테이크와 정적인 카메라는 관객에게 인물들의 대화 속의 침묵, 어색한 멈춤, 그리고 사소한 배경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도록 요구하며, 이는 시간의 단순한 경과를 넘어 존재의 지속을 경험하게 합니다. 자연광을 주로 사용하는 촬영 방식은 영화에 인위적인 조명이나 필터 없이 순수하고 정직한 현실의 질감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형식적 절제는 결과적으로 '대화'라는 행위 자체에 모든 미학적 무게를 집중시키며,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이 가장 평범한 순간에 포착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의 하루'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그릇으로 기능합니다.
반복되는 행위와 공간의 의례화: 영원회귀의 미학적 상징
'우리의 하루'에서 인물들이 수행하는 일련의 반복적인 행위와 그들이 머무르는 고정된 공간은 일상의 의례화(Ritualization of Everyday Life)라는 미학적 구조를 형성하며,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인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의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반복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 순환적이며, 매 순간이 근본적으로 유사한 질문과 경험으로 채워져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징표입니다. 인물들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술을 마시며, 식사를 준비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은 서사적 진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시간의 횡단면을 무한히 복제하며, 관객에게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순간과 미래의 순간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식사와 음주는 이 의례화의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식탁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소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물들이 자신의 가장 사적인 감정과 불안을 표출하는 일종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술(주로 와인, 맥주, 또는 막걸리)은 이 의례를 촉진하는 '촉매제'로서, 인물들이 평소에는 꺼내기 힘들었던 노년의 회한, 예술적 좌절,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시적으로 완화하거나 혹은 솔직하게 폭로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적 통과 의례이며, 이를 통해 인물들은 잠시나마 고독을 벗고 타인과의 일시적인 친밀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친밀감은 술이 깬 후에는 다시 사라지고, 다음 방문객과의 만남에서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될 운명입니다. 이 반복되는 식사와 음주의 리듬은 삶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인간의 숙명적인 진통제 사용을 상징하며, 매번 새롭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삶의 부조리함을 해학적으로 드러냅니다. 공간의 반복적인 활용 또한 의례화의 중요한 축입니다. 영화 속 실내 공간은 대부분 좁고, 가구가 많으며,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근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폐쇄적인 실내는 인물들의 내면세계의 한계와 고립을 반영합니다. 특히 시인의 집과 여배우의 집이 서로 다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구도와 분위기로 반복되어 제시될 때, 이는 두 인물이 겪는 예술가적 고독과 노년의 위기가 보편적인 형태의 숙명임을 시각적으로 강조합니다. 카메라는 이 공간 안에서 제한된 움직임만을 허용하며, 인물들이 이 물리적, 심리적 감옥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정원이나 마당과 같은 외부 공간 역시 자연의 무한함을 상징하기보다는, 철저히 인간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질서가 부여된 '정돈된 영역'으로 나타나, 인물들의 삶의 궤도가 결국 순환적이며, 근본적인 탈출구가 없는 반복임을 시사합니다. 이 공간적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즉 "네가 살았던 이 삶을, 지금처럼,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미학적으로 구현합니다. 고양이 돌보기라는 행위의 반복은 이 의례화에 윤리적인 차원을 더합니다. 여배우가 고양이의 건강을 염려하고 먹이를 주는 행위는, 자신의 죽음과 삶의 무의미함에 직면한 인물이 비인간적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원초적인 '돌봄'의 의례를 통해 잠시나마 삶의 의미와 연속성을 부여받으려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고양이는 시간의 흐름과 죽음의 법칙에 순응하는 자연의 존재이며, 이를 돌보는 행위의 반복은 인간의 불안정한 존재론적 위치를 잠시나마 안정시키는 존재의 닻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반복적인 행위와 공간의 의례화는, 인간이 자신의 삶이 필연적으로 무의미의 순환 속에 갇혀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매일매일의 소박한 의례를 통해 그 무의미를 견뎌내고 수용하는 지혜를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희극적으로 견뎌내는 인간 존재의 초상을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노년과 예술가적 고독: 죽음과의 대화를 통한 비극적 희극성
'우리의 하루'는 노년기에 접어든 두 예술가, 즉 시인과 은퇴한 여배우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예술가적 고독이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탐구합니다. 이 두 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유한함과 창조성의 쇠퇴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의 대화는 이러한 종말론적 인식을 극도의 비극적 희극성(Tragicomedy)이라는 독특한 톤으로 다룹니다. 노년은 단순히 육체적 쇠퇴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에게는 창조적 불꽃의 소진과 시대적 관련성(Relevance)의 상실이라는 존재론적 위기로 다가옵니다. 시인의 고독과 회한은 이 주제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냅니다. 시인은 젊은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문학적 경험과 인생의 교훈을 전달하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권위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 비하와 씁쓸한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더 이상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알고 있으며, 젊은 세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깊이 공감하지 못할 것임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시인의 대화는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고독한 의례로 변질됩니다. 그는 타인과 소통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쇠퇴하는 자아와 고통스럽게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독은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이 쇠퇴하는 예술가로서의 내적 대립에서 비롯된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고립입니다. 시인의 말속에는 삶의 비극적 진실이 담겨 있지만, 그가 이 진실을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하는 태도는 비극성을 희극 화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반면, 여배우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상대적으로 더 초연하고 철학적인 깊이를 지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던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경험을 곧 자신이 맞이할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운명과 연결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 주제를 다룰 때 극적인 감정이나 공포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덤덤하고 평온한 어조는 삶과 죽음이 결국 자연의 순환 과정이며, 인간의 존재 역시 이 거대한 순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동양적인 수용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여배우는 연기라는, '존재가 곧 사라지는' 예술을 수행해 온 경험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이미 체화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소멸의 미학'에 대한 이해가 그녀에게 죽음을 담담하게 직시할 수 있는 철학적 평정심을 부여합니다. 이 두 인물의 대화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이 바로 비극적 희극성입니다. 삶의 가장 무거운 주제인 죽음, 고독, 실패가 인물들의 어색한 유머, 사소한 사회적 실수, 그리고 술 취한 비틀거림 속에서 표현될 때, 영화는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유발합니다. 예를 들어, 시인이 진지한 예술론을 펼치다가 갑자기 사소한 일상의 불편함을 토로하거나, 여배우가 고양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다가도 곧 음식의 맛에 집중하는 모습은, 인간이 비극적인 진실 앞에서 사용하는 생존적 방어 기제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큰 고통이나 진실을 직면할 때, 이를 즉각적으로 희화화하거나 일상의 소소함으로 희석시켜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처럼 해학적인 방식을 통해 삶의 부조리함을 직시하는 지혜를 제시합니다. 즉, 삶이 근원적으로 비극적일지라도, 그 비극을 견디는 방식은 웃음과 덤덤함이라는 희극적 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하루'는 노년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운명 앞에서 예술가로서의 고독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하루라는 소박한 시간의 틀 안에 덤덤하게 담아냄으로써, 인간 존재의 숙명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아모르파티(Amor Fati)'의 미학적 초상을 완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