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버닝 존재의 모호성과 계층적 소외

by journal30885 2025. 10. 3.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하여, 현대 한국 청년들의 무력감과 불안정한 계층적 상황, 그리고 진실과 환상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유아인 분)를 중심으로, 그의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 분)와의 우연한 재회, 그리고 해미의 새로운 연인인 정체불명의 부유한 청년 벤(스티븐 연 분)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균열과 미스터리를 다룹니다.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나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틀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해미의 존재 자체가 환상인지 실재인지, 벤의 '비닐하우스 소각' 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 없는 탐구를 통해,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청춘들이 느끼는 존재론적 공허함을 형상화합니다. 특히, 영화가 보여주는 벤과 종수의 삶의 극명한 대비, 즉 여유롭고 목적 없는 벤의 상류층 생활과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종수의 하층민 생활은 현대 한국 사회의 계층적 간극을 가장 냉혹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서사로 기능합니다. 종수는 벤을 통해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즉 '위의 세계'를 목격하며 열등감과 분노를 축적하고, 이는 결국 파국적인 폭력으로 귀결됩니다. 이창동 감독 특유의 느리고 절제된 미장센과 긴 호흡의 촬영은 인물들의 내면적 불안을 극대화하며, 영화 전체에 흐르는 미결의 서스펜스는 '버닝'을 21세기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징후적 텍스트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이 분석은 '버닝'이 구현한 세 가지 핵심 미학적, 사회학적 관점, 즉 서사의 모호성, 계층적 욕망의 시선, 그리고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경을 중심으로 이 걸작의 깊은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부하고자 합니다.

버닝 존재의 모호성

'버닝'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는 서사적 모호성(Narrative Ambiguity)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관객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를 거부하며, 종수의 주관적인 시선을 통해 포착된 사건들만을 나열함으로써, 진실과 환상,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영화의 미스터리적 요소를 강화하는 동시에, 종수라는 불안정한 화자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미결의 서스펜스를 창출합니다. 이 서사적 전략은 관객을 종수의 내면세계에 깊숙이 끌어들이면서도, 그가 경험하는 현실이 객관적 진실인지, 아니면 그의 망상이나 피해 의식의 산물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듭니다. 종수의 시선은 영화의 시청각적 경험을 지배하는 유일한 필터입니다. 우리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만을 접하게 되며, 이는 전통적인 미스터리 서사가 제공하는 객관적 진실 탐구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봉쇄합니다. 핵심적인 모호성은 해미의 존재와 실종에서 발생합니다. 해미는 영화 초반, 아프리카 여행 후 벤과 함께 돌아오면서 종수의 삶에 갑작스럽게 개입합니다. 그녀의 미스터리한 과거(어릴 적 우물 이야기), 끊임없이 춤추는 행위, 그리고 여행 후 급작스러운 실종은 그녀를 현실 세계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종수의 외로움과 욕망이 투사된 환영적 존재(Phantasmal Being)처럼 보이게 합니다. 해미의 실종 이후, 종수는 벤이 그녀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고 벤의 주변을 탐문하지만, 이 모든 수사 행위는 철저히 종수의 개인적인 해석과 추측에 의존합니다. 영화는 벤이 실제로 해미를 해쳤다는 명확한 증거나 목격자를 제시하지 않으며, 단지 벤의 부유하고 무감각한 태도, 그리고 그가 '태우는' 비닐하우스에 대한 고백만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벤의 행위가 해미의 실종과 연관이 있는지, 아니면 종수의 하층민으로서의 피해 의식과 질투심이 만들어낸 망상적 연결인지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종수는 벤을 추적하며 자신이 정의로운 탐구자라는 역할을 부여하지만, 이 과정은 사실상 자신이 벤의 세계에 의해 무시당하고 소외되었음을 확인하려는 자기 학대적 의식에 가깝습니다. 그가 발견하는 모든 '증거'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파편일 뿐이며, 이는 진실이 아닌 종수 자신의 분노와 망상으로만 구성된 '개인적 누아르'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감독은 이 모호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리얼리즘적 배경과 미스터리적 심리 스릴러의 장르 문법을 성공적으로 교차시킵니다. 종수의 삶은 한국 청년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 가부장적 압박, 그리고 농촌 사회의 쇠퇴라는 매우 현실적인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벤의 존재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추상적이고 무감각한 힘을 상징하는 미스터리적 요소에 가깝습니다. 벤의 정체성, 그의 수많은 '놀이 친구'들, 그리고 그의 재산의 출처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이는 그가 현실 세계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종수의 눈에 비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상징적 기표임을 암시합니다. 벤의 비현실적인 완벽함과 여유는 종수의 불안정한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하며, 두 세계의 충돌 지점에서 발생하는 균열이 바로 서사의 핵심 긴장입니다. 벤의 비닐하우스 소각 취미는 이 균열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종수는 이를 단순한 방화가 아닌, 하층민의 존재 자체를 소거하려는 계층적 폭력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종수의 분노와 절망을 정당화하며, 그가 벤을 향한 복수를 감행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버닝'의 미결의 서스펜스는 실존적 미스터리로 귀결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그의 차와 시체를 불태우는 행위는 현실적인 범죄의 완수가 아니라, 종수 내면의 억압된 분노와 열등감, 그리고 해미를 되찾지 못한 상실감을 해소하기 위한 의례적 폭력(Ritualistic Violence)에 가깝습니다. 종수는 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벤의 세계와 계층에 가한 폭력을 상상하지만, 그의 삶의 본질적인 공허함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 폭력은 종수의 무기력한 삶에 일시적인 '의미'와 '능동성'을 부여하지만, 결국 그의 삶은 이 폭력으로 인해 더욱 깊은 고립과 파멸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버닝'의 모호성은 현대 사회에서 진실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인 진실의 부재가 인간의 존재와 행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서사적 미결 상태를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여운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버닝'만의 독특한 미학적 성취입니다. 감독은 이 모호성을 통해 현대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과 '진실'이라는 거대 담론이 사실은 소외된 개인에게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냉정하게 고발합니다. 종수의 시선에 갇힌 채 진실을 찾아 헤매는 관객의 경험은 곧 현대인의 실존적 방황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계층적 욕망의 시선과 벤의 존재론

'버닝'은 세 주인공의 상이한 경제적 위치를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계층적 욕망과 소외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종수는 몰락한 농가를 대변하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생계를 위해 임시직을 전전하며 경제적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흙수저' 청년 세대의 전형을 상징합니다. 그의 삶은 부채, 불안정한 노동, 그리고 작가로서의 좌절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며, 이는 그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을 분노와 열등감의 필터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반면, 벤은 직업도, 명확한 삶의 목표도 없이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매일매일 '놀이'를 즐기는 '금수저' 신흥 부유층을 대변합니다. 그의 재산의 출처는 모호하고, 그의 일상은 완벽하게 정돈되고 소비 지향적입니다. 이 두 인물의 만남은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라, 계층적 욕망의 시선(The Class Gaze)이 충돌하는 장이며, 종수의 내면에 쌓인 열등감과 분노가 폭발하는 근원적 계기가 됩니다. 종수는 해미를 통해 벤의 세계를 '엿보게' 되는데, 이는 일방적인 관찰자의 시선입니다. 벤의 삶은 종수에게는 완벽한 '미스터리'이자,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로 인식됩니다. 벤은 타인의 삶과 감정에 대해 극도의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며, 모든 것이 그의 '놀이'의 영역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벤의 이러한 무감각한 여유는 종수의 절박한 생존 투쟁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종수에게는 벤의 존재 자체가 구조적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벤이 자신의 삶을 "남들이 살고 싶어 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은, 그가 스스로의 노력 없이 이미 사회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특권층의 존재론적 특권을 암시합니다. 벤은 노동이나 고통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순수한 자본의 힘을 의인화한 존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의 존재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매 순간 상기시키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벤의 완벽한 자기만족과 종수의 끊임없는 결핍은 현대 사회의 계층 간 단절이 물질적인 것을 넘어 존재론적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벤이 고백하는 '취미'인 비닐하우스 소각 행위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상징적 기표(Symbolic Signifier)입니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씩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워 없앤다"라고 말하는데, 비닐하우스는 농촌의 쇠퇴와 하층민의 불안정한 생계를 상징하는 리얼리즘적 요소입니다. 벤의 소각 행위는 단순한 방화가 아니라, 사회의 가장 낮은 곳,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본주의적 소비 행위의 극단적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벤에게 이 행위는 일종의 심미적 유희이자 지루함을 해소하는 '놀이'이며, 이는 그의 특권적 지위가 부여하는 무해한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종수는 이 비닐하우스가 바로 해미를 포함한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을 은유한다고 믿습니다. 즉, 벤의 '파이어(Fire)' 행위는 그가 자신의 지배적인 계층적 위치를 이용해 하층민의 삶을 쉽게 소각하고 제거할 수 있다는 정서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상징합니다. 종수는 벤의 이 행동에서 자신이 속한 계층의 운명을 예감하며, 이는 그의 분노를 개인적인 질투를 넘어선 계층투쟁의 영역으로 끌어올립니다. 종수의 분노는 바로 이 존재의 멸시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벤이 해미를 '태웠다'라고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절박한 감정(사랑, 질투, 열등감)을 벤의 무심한 계층적 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복수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종수의 '복수'는 사법적 정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감각한 자본의 폭력에 대한 하층민의 최종적이고 파국적인 항거입니다. 이 폭력적 해소는 종수의 무기력한 삶에 일시적인 '의미'와 '능동성'을 부여하지만, 결국 그의 삶은 이 폭력으로 인해 더욱 깊은 고립과 파멸로 나아갑니다. 벤의 존재론은 종수에게 자신의 계층적 소외를 극명하게 깨닫게 하는 거울이자, 그가 넘을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의 냉혹한 투영체였습니다. 영화는 벤이라는 인물을 통해, 부의 축적이 어떻게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고 타인의 고통을 '소각' 가능한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합니다. 종수의 파멸은 결국 그가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지 못하고, 시스템의 가장 깨끗하고 비현실적인 상징만을 제거하는 데 그친, 비극적인 개인의 실패로 기록됩니다.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경과 외로움의 신체성

'버닝'이 보여주는 풍경은 한국 사회의 외형적 번영 뒤에 숨겨진 포스트-아포칼립스적(Post-apocalyptic)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서울 변두리와 경계 지역, 그리고 쇠락한 농촌 지역으로, 이는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잉여 공간(Surplus Space)'을 상징합니다. 종수가 거주하는 파주 지역의 황량하고 낡은 농가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뒤처진,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입니다. 북한과의 접경 지역인 이 지리적 배경은 종수와 해미가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경계인'임을 강조하며, 그들의 삶이 외부의 통제와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은유합니다. 이러한 황폐한 풍경은 세 주인공의 존재론적 고립과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강화합니다. 그들은 대도시의 중심에서 벗어난 경계인이며, 서로 연결되려 하지만 결국 각자의 외로움 속에 갇혀버립니다. 이 풍경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현재의 무기력함에 갇혀버린 청년 세대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환경적 투영체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고립된 존재의 상태는 인물들의 신체성(Corporeality), 즉 그들의 몸짓과 행위를 통해 극대화됩니다. 특히 해미의 신체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의 기표로 기능합니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배운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개념을 언급하며, 자신의 삶의 공허함(Great Hunger)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입니다. 그녀의 춤은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계층적, 실존적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원초적 해방의 몸부림이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해미가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옷을 벗고 추는 나체의 춤 장면은 이 영화의 미학적 정점 중 하나입니다. 이 춤은 섹슈얼리티를 넘어선 극한의 신체적 노출을 통해, 해미가 자신의 불완전한 존재를 관객과 종수, 벤이라는 시선 앞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려는 의례적 행위로 해석됩니다. 그녀의 몸짓은 리듬과 감정에만 의존하며, 사회적 규율이나 계층적 억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탈주'를 시도합니다. 종수는 이 춤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그녀와 감정적으로 연결되지만, 벤은 지루함을 느끼는 극명한 반응은, 같은 행위에 대한 계층적 감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벤에게 이 춤은 소비할 수 있는 하나의 '볼거리'에 불과하며, 종수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절규로 다가옵니다. 종수의 신체성은 해미나 벤과 달리 억압과 무력감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는 항상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말수가 적으며, 내면의 분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삭이는 인물입니다. 그의 몸은 가부장적 압박(아버지의 폭력적인 존재)과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진 듯한 상태입니다. 종수가 벤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 그의 신체는 오직 벤의 세계를 감시하고 추적하는 도구로만 사용됩니다. 이 억압된 신체성이 최종적으로 폭발하는 것이 벤을 향한 살인과 방화라는 극단적인 행위입니다. 이 폭력은 종수가 자신의 무력한 신체와 삶을 재구성하려는 마지막 시도이자, 억압된 분노가 밖으로 튀어나온 파국적 신체 행위입니다. 그는 벤의 시체와 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결국 그가 남는 것은 황량한 눈밭 위의 발가벗겨진 자신의 신체뿐입니다. 이 모습은 모든 사회적 가면과 계층적 위장을 벗어던진, 완전히 고립된 인간 실존의 비극적인 초상입니다. 반면, 벤의 신체는 항상 완벽하고 여유로우며, 어떤 긴장감이나 고통도 보이지 않는 '무결점의 신체'입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은 그가 사회의 고통과 무력감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벤의 신체는 노동의 흔적이나 고통의 징후가 전혀 없는, 자본주의적 특권의 완벽한 표상입니다. 이처럼 '버닝'은 세 인물의 신체 언어와 그들이 놓인 황폐한 풍경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이 느끼는 깊은 외로움과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드러내며, 이 외로움이 어떻게 비극적인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탐구합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종수가 벤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장면은, 그가 모든 것을 잃은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고립 상태에 도달했음을 암시하며, 현대 청춘들의 근원적인 절망을 고발합니다.